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문단 편집) === 몰락 === 그러나 세속적 무슬림이었던 팔라비는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특히 이란의 전통적 상인 계급인 '바자리'들의 지지를 서서히 잃게 되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한 것도 많은 사람들의 반발이 심해졌으며[* 단순히 인정한 정도가 아니라 홍해를 통해 석유를 팔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때의 이스라엘과 이란은 우호적인 관계였다. 사실 종교적인 감정 이외에도 팔라비 왕조는 이전부터 뒷구멍 무역을 통해 부정축재를 일삼았던 전적이 꽤나 많았다. 대표적인게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석유를 팔다가 영국과 소련에게 발각돼서 나라가 절단이 날 뻔한 적이 있다.], 황실과 그 측근들이 부정부패를 일삼아서 그에 대한 불만들이 가득한 상황이 되었다. 이란의 [[공산주의]] 정당인 민중당[* 투데(Tudeh) 당이라고도 한다. 1949년에 팔라비를 암살하려다 부상만 입히고 실패한 전적이 있다. 이슬람 공화국 치하에서 금지당하고 지금은 유럽을 근거지로 하고 있다.]의 활동을 금지시켰으며, 자신의 정보기관이였던 SAVAK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하거나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었는데 1978년 당시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잡혀온 이란의 정치범의 숫자가 최소 2,200명이었다고 하며 이 정치범 숫자들은 팔라비의 개혁이라는 '백색혁명'이 진행될수록 계속해서 증가했다. 특히 팔라비는 히잡 착용의 금지[* 사실 이는 선대 레자 팔라비 시절인 1936년부터 시작된 일이다. 물론 선대와는 달리 히잡 착용을 빡세게 금지시키지는 않았다.] 및 사원의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등 이슬람의 세속화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는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같은 이슬람 율법자들의 거센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팔라비의 폭압정치와 부정부패 그리고 여러 정책들로 인해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은 팔라비를 지지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이란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호메이니는 이슬람 세속화 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체제 운동가로 찍혀서 이란에서 추방되어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이란 국내의 반체제 인사들이 크게 반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냉전 하에 석유에서 얻은 돈을 바탕으로 근대화 추진정책을 펴던 이란은 [[오일 쇼크]]로 막대한 돈을 벌여들였고, 1인당 국민소득도 급속히 올라갔지만 오일쇼크로 얻은 돈은 골고루 배분되지 않아 빈부격차를 확대시켰고 계층간 위화감도 심해졌다. 또한 타 걸프 국가도 빈부격차는 심하기는 했지만 각 가정마다 가정부를 한둘씩은 기본적으로 두고 노동력을 대대적으로 수입하기까지 할 정도로 매우 부유해졌지만 이란은 타 걸프만 국가와는 다르게 이미 인구가 3천만에 달했기에 이란의 서민들은 이러한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란의 산업 부문은 갑자기 늘어난 소비력을 감당하기에 부족했고 수입품들이 이란 시장을 휩쓸면서 산업 경쟁력은 크게 악화되었는데 이를 메꾸려고 통화량을 증가시켰지만 이러한 통화량 증가는 물가상승으로 이어지면서 중소상인들과 농민들이 몰락하여 팔라비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팔라비가 미국을 방패로 개발독재정책을 펴는 것에 염증을 느낀 이슬람 운동권은 반체제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련의 지원을 받는 이란 공산당도 합세하면서 사태는 악화되어 간다. 그렇게 1978년 초부터 학생들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팔라비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는데, 암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던 상황에도 샤는 [[테헤란]] 시내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하지만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갔고 군대마저 등을 돌리게 되자 결국 팔라비는 "나는 지쳤다."라는 말과 함께 1979년 1월 16일 휴가라는 명목하에 전용 보잉 727기에 황후와 가족들, 측근들을 태우고 [[이집트]]로 [[망명]]했다. 그가 망명하고 난 이후 샤푸르 바크티아르 총리[* 이란 최후의 세속주의 총리로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1991년 파리에서 이란 신정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암살당한다.]가 섭정 체제로 국정을 운영하였으나 호메이니가 1979년 2월 1일, 15년만에 귀국한 뒤 10여일간의 격전을 거쳐 완전히 제압당했다. 호메이니는 바로 이슬람 혁명평의회를 조직한 뒤 메흐디 바르자간을 총리로 임명했고 (형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했다. 망명중이던 팔라비는 이후 암 치료를 위해 황후와 함께 미국으로 갔지만 팔라비의 미국 입국에 반발한 이란 대학생들이 1979년 11월 4일에 테헤란의 미 대사관을 점거하고 팔라비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미국은 거부한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는 극도록 악화되었다. 이후 팔라비는 이집트에서 잠시 머물다가[* 5월에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모로코[* 같은 군주국이라 잘 대해줄 거라고 믿었지만 당시 모로코의 국왕이던 하산 2세가 망명 조건으로 돈을 뜯어내려고 하자 떠나버렸다.], 미국[* 카터 대통령은 팔레비를 질색했지만 키신저와 록펠러 가문의 로비로 받아들여줬으나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터지면서 나가라고 압력을 주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록펠러 가문 소유의 맨해튼 체이스 은행은 이란 황실과 밀접한 관계였는데 인질 사건과 그 후 제재 과정에서 비자금을 꿀꺽한다], 멕시코[* 멕시코와 비교적 우호적인 쿠바가 미국의 꼭두각시를 받았다고 비난하고, 새 이란 정권과의 관계도 신경써야 했던 멕시코 정부가 떠나라고 압력을 줬다. 멕시코는 전통적으로 외교에서 불간섭주의를 펴는 나라인걸 감안해야 한다], 파나마[* 파나마의 실권자였던 오마르 토리요스도 팔라비를 싫어해서 좌익 성향의 교수를 팔라비가 있는 병실에 눌러 앉혀 팔라비를 계속 비난하게 했다.], 바하마 등을 떠돌다가 다시 이집트로 돌아왔고[* 자신과 절친했던 이집트의 독재자인 [[안와르 사다트]] 덕이 컸다. 특히 사다트는 팔레비와 그의 가족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생활비를 주는 특혜를 베풀어주었다. 안와르 사다트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는 한 원인이 바로 팔라비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그가 암살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란 정부는 사다트 암살범을 영웅 대접해주었다고.] 얼마 되지 않아 말 그대로 [[객사]]했다. 장례식은 사다트에 의해 특별히 국장으로 치러졌고 사다트도 직접 참석하여 애도했지만, 재위 시절 그가 믿던 서방에서는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것 외에는 참석한 사람이 없다시피했다고 한다.[* 사다트의 장례식에 [[지미 카터]], [[제럴드 포드]], [[리처드 닉슨]] 미국 전직 대통령들과 [[이스라엘]],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등 많은 서방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참석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1952년 [[이집트 왕국|이집트 군주정]]이 폐지되었을 때 이집트의 실질적 마지막 왕이었던 [[파루크 1세]][* 샤의 첫 부인 [[https://en.wikipedia.org/wiki/Fawzia_Fuad_of_Egypt|푸아드 공주]]의 오빠이다. 즉 한때는 손위 처남-매부 관계였던 셈. 물론, [[나세르]]의 쿠데타 당시에 샤와 푸아드 공주는 이미 이혼한 상태]가 망명을 요청하자 거부한 바가 있다.[* 단, 파루크 1세의 경우 옛날에 자기 여동생하고, 매제의 보물을 훔친것도 모자라서 [[레자 샤 팔라비]]의 장례식때 관속에서 보물을 훔쳐간 이력이 있었다.] 이에 파루크 1세는 "너라고 황위를 영원히 지킬 줄 아느냐?"라고 비아냥거리며 유럽으로 망명했는데, 본인도 똑같은 꼴을 당한 걸 넘어 이집트로 망명을 갔으니 참 세상만사 [[새옹지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